동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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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특강]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문화유적을 발굴하시는 김태형 선..
2024-05-31
지난 4월 29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근무하고 계신 국사학과 07학번 김태형 선배님께서 후배들을 위해 <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의 삶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주셨습니다. 강연은 취업을 위한 슬기로운 학교생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개 및 현재 진행 중인 발굴 조사 소개, 국공립 기관에서 일하기 위한 조건 및 마음가짐과 같은 주제들로 진행되었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있는 7개의 문화재 연구소 중 1곳으로 대구와 경북지역의 신라문화 조사를 담당하고 있으며 ‘신라 왕경 학술연구(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신라 월성 학술연구(월성 발굴 조사)’, ‘신라 고분 학술 연구(쪽샘 지구 및 금척리 고분군 발굴조사)’, ‘산라 사찰 학술연구(황룡사지 발굴조사)’,‘ 대구* 경북 지역 유물 보존관리’와 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두 번째로 현재 발굴조사 중인 월성 학술연구팀의 구성과 팀별 역활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월성 학술연구팀은 발굴조사팀, 고환경 연구팀, 홍보* 해설팀, 외국어 번역팀, 정비* 복원팀, 문헌연구팀, 디지털기록 등 6개의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발굴조사팀의 경우 특정 구역을 중심으로 조사 및 출토유물관리 역할을 수행하고, 고환경 연구팀은 발굴 조사 중 나온 식물유체, 동물유체, 목재유물의 연구를 진행, 홍보* 해설 팀 같은 경우 월성 유적에 대한 해설과 교육, 전시, 홍보, 영상촬영과 같은 업무을 한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국공립 기관의 소개 및 응시자격, 준비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국공립 기관은 국립, 도립, 시*군립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대표적인 기관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강원문화재연구소, 신라문화연구원등과 같은 기관이 있고 국사학과를 졸업할 경우 지원 자격에 부합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경험을 쌓으면 도움이 될것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강연을 통해 국사학과 학생들이 문화재연구원의 삶에 대해 한층 더 알아가는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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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진심으로 전하는 마을의 역사. 마을문화기록연구원 김태연의 이야..
2021-02-23
1, 자기소개 Q.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A. 저는 화성시 봉담읍에 위치한 마을문화기록연구원의 아키비스트, 김태연 주임입니다. Q. 마을문화기록연구원으로 취업을 한 거네요?A. 네 작년 4월, 28살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Q. 마을기록문화연구원의 어떤 점이 매력으로 다가와서 입사를 희망하게 되었나요?A. 제가 국사학과에서 학과공부를 하는 동안 매번 느꼈던 회의감이 있어요. [왜 이렇게 역사를 멀리서 보고 있을까. 국가, 왕, 정치에 국한된 거시적인 역사뿐일까. 보다 가까이서 보는 역사, 민중의 이야기를 내가 공부할 수 없을까. 그리고 기록 속에 담긴 이야기의 기표나 상징 등 해석될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사실관계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저런 고민에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다가 졸업을 하게 되었지요. 여러 직장을 옮겨 다녔어요. 발굴하는 곳도 가봤고, 글 쓰는 잡지회사도 가봤는데 당장 굶주림은 해결해도 결국 마음이 허한 거예요. 그렇게 전전하다가 이곳의 공고를 봤는데 마을 아카이브라는 일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카이브가 뭘까, 하면서 알아봤어요. 각 지역을 찾아가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수집한 지역사와 인생사를 글로 옮기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마침 사라지는 마을을 기록한다고 들었는데, 면접 얼마 전 제가 살던 동네를 가보니 집터도 없이 모든 흔적이 사라져,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몇 년 살다가 떠난 내게도 이렇게 큰 상실감인데, 수십 년을 고향으로 두고 살아온 사람들에겐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습니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가 전해줄까? 싶었습니다. 힘 없는, 민중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내가 추구했던 역사가의 방향이 아닐까 하면서,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고,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2. 직업소개 Q. 그러면 구체적으로 마을문화기록연구원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A. 마을문화기록연구원은 특정 지역을 찾아가서 지역민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민속문화, 가령 마을제사, 잔치, 대표 인물, 금기 등의 지역사를 수집합니다. 또한 그분들의 생애사를 함께 에세이 형태의 글로 옮겨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자 제작 과정에서 시에서나 군 또는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정보들도 같이 수렴을 하고 그 외에 역사연구단체에서 만들어놓은 데이터들도 함께 수집 및 참고해 하나의 지역사 기록물로 만들어내는 일을 맡습니다. 사업은 보통 공공단체와 함께 이루어지는데요. 도시재생 사업이나 기록화사업 의향을 단체에서 밝히면, 참여 기업을 뽑는 입찰이 열리게 됩니다. 이에 저희가 이에 맞는 양식을 준비하고, 대상 지역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와 함께 제안서를 작성해 신청합니다. 단체 측에서 응하여 계약 체결이 되면 작업에 착수합니다. (Q. 비즈니스 모델이 일반 개인에게서 얻는 이익이아니라 공공기관을 상대로 이익을 취하는 사업인거죠? A. 네 맞습니다.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합니다.) Q. 그럼 주임님의 주요 업무는 무엇인가요?A. 저의 경우에는 제안서 준비, 책자 전반의 기획안 수립, 자료 수집, 주민을 대상으로 한 설명 영상 제작, 현장 인터뷰, 사진촬영, 인터뷰 내용을 글로 작성하는 작업을 해요. 또 디자인팀과 함께 의논해서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 하는 전체적인 의논도 하고 있어요. 기록사업에서 종종 전시를 준비할 때도 있는데, 전시 기획 역시 함께 맡고 있습니다. 기획에서 집필까지 전반적인, 마을기록책자를 만들 때 필요한 부분은 대부분 참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Q. 그러면 이러한 데이터를 가지고 책을 만드는 것(글로 남기는 것)이 우선 목적인건가요?A. 네 맞습니다. 글로 남기고, 전자데이터로 남기기도 하고요. 저희가 이번에 새로운 데이터 저장방식을 찾아서 적용 중인데, 워드프레스라고 해서 홈페이지를 만드는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저희가 모아놓은 자료를 전자데이터로 변환하여 인터넷 아카이브 형태로 만드는 시도 중입니다. Q. 이렇게 책으로 남긴다고 하니 정말 흥미롭네요. 책이면 사진을 많이 찍으실텐데 영상으로의 수집은 어떻게 남기나요?A. 영상은 전문 캠코더를 통해 촬영하고, 파일을 아카이브에 업로드하고 공공단체와 함께 공유도 하고 있습니다. 일부 사업의 경우 외부 촬영, 편집팀을 고용하거나 하는 식으로 전문적인 영상을 만들어 회사 유튜브에 업로드하기도 합니다. Q. 공공기관과 연계를 해서 사업을 따서 한다고 하면 수익모델이 일정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데 매번 똑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인지 궁금합니다.A. 솔직히 저희가 바쁜 이유가 이 제안서를 작성하는 작업이 상당히 시간을 많이 소모합니다. 사업이 체결되어야 저희가 일을 할 수 있다 보니 회사 사람들 모두 제안서에 공을 많이 들입니다. 그래도 횟수가 많이 차다 보니 저희를 알아주시는 분들도 많아졌고 해서 요즘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은 아니구요. 오히려 가끔은 일거리가 너무 많아 다 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걱정입니다. 하하. 최근에도 저희가 인터뷰를 다닌 지역에서도 호응이 되게 좋은데, 해당 지역에서 연계적으로 하고 있는 기록사업 또한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Q. 마을문화기록연구원의 경쟁사가 많은가요?A. 아카이브 업체가 많지는 않아요. 전국에. 그런데 많지는 않은데 생각보다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학교에서나 공공단체에서 기록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저희의 경쟁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은 공적 아카이브로, 저희는 민간 아카이브라고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다보니 공적인 부분에서는 사실 그 자체의 전달에 그칠 수 있으나, 저희는 민간 차원으로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Q. 아카이브 사업의 향후 전망(은 어떻게 되나요)?A. 아카이브 사업이라는 것이 저희는 초기단계라고 생각해요.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역사라는 것은 사실관계의 나열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까지는 ‘답은 하나다. 답은 정해져있다. 두 개의 답이 양립할 수 없다.’ 라는 일원론적 관념, 선형적인 관념이 지배적이었으나 이는 점차 깨지고 있고, 점차 다양성에 대해서 탐구되는 사회가 도래했습니다. 또한 현재 인문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각박해진 사회 속에서, 사람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을 얻고자 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입니다. 오늘날 아카이브는 멀어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잊고 지나친 작은 역사들의 편린을 재발견함으로서 인간성을 탐구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사업으로 재평가 될 것입니다. Q. 이게 어떻게 보면 어르신들의 기억에 의존한 데이터잖아요. 원래의 역사에서는 증거를 가지고 하나의 통념에 도달하려고 하는데 아카이브를 한다고 하면 어르신들의 기억이 상충되는 경우가 있을 텐데 그분의 기억 자체를 역사로 보는 건가요?A. 그건 아니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다보면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아요. 누구는 ‘79년에 일어난 일이야.’ 또 어떤 사람은 ‘80년에 일어난 일이야.’ 라고 하시는데 이런 경우에는 이 사건이 언제의 일인가 충분한 조사를 거쳐서 주석을 붙이거나 하는 식으로 사실검증을 거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자 함이지, ‘사실 자체는 상관없어’ 이런 것이 아니에요. Q. 인터뷰 대상은 어떻게 정하나요?A. 공공단체에서 일을 받아온 후 대상지는 어떤 지역인지 추가적으로 조사합니다. 이곳은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역에서 관련된 역사적 이슈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의 사료조사는 물론, 현재는 몇 명이 살고 있으며 이곳의 커뮤니티 단체는 무엇인지 조사하고, 커뮤니티를 진행하고 있는 분들이 누구인지 지자체장, 노인회 회장, 경로당을 찾아가면서 거기서 커뮤니티를 진행하고 있는 분들을 먼저 찾아뵙습니다. 기록사업 전반에 대한 내용을 전달 드리고, 지역 거주 어르신들을 함께 찾아뵙고 인터뷰 요청을 드립니다. 이에 승낙 후 연락처를 공유 받아 저희가 다시 찾아뵙는 과정을 거칩니다. Q. 이렇게 인터뷰를 하다보면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아요. 마음을 안 열어 주신다거나 그런 불편한 점 힘든 점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A. 저희가 지금 직면한 문제가 있는데, 이번에 아카이빙을 시작하는 곳인 화성시 황계동에서의 갈등이에요. 황계동이 수원전투비행장 바로 옆에 있어서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곳인데, 그래서 그런지 주민들의 신경이 날카롭고, 지역 내 갈등이 빚어져 외지인에 대해 마음을 꾹 닫고 있어요. 이처럼 어떤 지역사업과 함께 착수할 때 누군가에겐 이득이 되고 우리한테는 이득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어요.이전에도 의왕시의 도룡마을이라고 그런 갈등이 좀 있었어요. 요 앞이 도룡마을이라는 곳인데 이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곧 없어져요. 아파트가 들어오니까 ‘우리는 돈을 많이 받네, 난 괜찮아’ 이런 분들도 있었고, ‘우리는 이 돈으로 어떻게 살아.’ ‘보상이고 뭐고, 고향을 어떻게 떠나느냐.’ 하며 싸우는 분들도 계셨어요. 저희가 찾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들 마음속의 벽이 점차 허물어져가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이 일을 제의했던 LH토지공사에서도 점차 주민들과의 벽을 허물어가면서 완만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 졌어요. 아직까지도 마을 통장님께서 종종 연락이 온답니다. 진심이 아니면 할 수 없었겠죠. Q. 결국엔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그런 과정이네요.A. 그렇죠. 그것을 위해서 저희가 계속 찾아뵙고 진실하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요. 나는 이일을 해서 ‘돈 벌어야지, 먹고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이분들에게 다가가면 주민들도 그 얼굴을 읽으리라 생각해요. 항상 진심으로 다가가면 주민들이 그에 맞는 답변을 해주세요. 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사는 생각이 있어요. 사람은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 영위를 위해 마주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나누기 위해 그 앞에 서있다고 여기면서 일에 임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철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고 했습니다. 저는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매번 현장에 나갈 때마다 배우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Q. 이 일의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A. 장점이라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아카이브를 하면서 나도 화성사람인데 화성에 이런 마을이 있었구나,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송산 지역이라고 화성시 서부 쪽에 위치한 곳이 있는데, 저는 국사학과면서 부끄럽게도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로 알았거든요. 3.1운동 때 일본순사를 처단하고 천명의 군중이 가까이 시위에 나섰다는 사실을 이번에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이런 것처럼 제가 국사학과면서 멀리서 보니까 놓쳤던 역사들도 확인할 수도 있고, 우리 지역인데도 몰랐던 것들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울릉도 아카이브를 맡게 되면서 울릉도 전역도 돌아보고, 또 운좋게 독도를 가보기도 했어요. 경험의 범위가 늘어나는 만큼, 뜻하지 않은 기회가 많다는 점이 이 일의 최대 장점인 것 같아요. 단점은 피로감이죠.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여느 출판사처럼 마감을 엄수해야하기 때문에 야근도 자주 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힘든 분들은 이 직업이 힘들 수 있겠어요. 뜻하지 않게 며칠 동안 집을 떠나는 일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힘드신 분들에게는 단점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전 출장 때면 항상 설레네요. 또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싶어요. Q. 이 연구소의 복지가 있다면?A. 복지라... 석식이 제공됩니다. 이사님이 함께 근무하다보면 점심도 사주시고. 운 좋으면 울릉도, 독도도 갈 수 있고요. 하하. 제가 만든 책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복지라고 봐도 되겠죠? < 기록단 동료들_울릉도에서>3. 취업과정 Q. 이후의 취업 과정이 궁금합니다.A. 인문 100년 장학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인문학도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후에도 인문학을 공부하고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다짐을 품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계속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인문학 공부가 너무 좋아서 공부만 하다 보니 취업준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간과했던 것 같아요. 졸업하고 나니 자격증도 별로 없고 남는 것은 블로그 등에 적어놓은 철학적 영화 분석, 독후감, 시, 여행기 등의 글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졸업 후 한 발굴 연구소에서 일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곳에서 전공인 역사를 통해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은 실상과 다르더라고요. 대학원 진학 강제, 차량 구매 요구 등 여러 가지 요구조건들과 합숙 등 폐쇄적인 환경이 제가 상상했던 환경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있는 이들의 태도, 발굴은 그저 ‘돈벌이’라는 것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나의 재능을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환경이 또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하다가 회사의 월간 잡지를 발간하는 사보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여기서도 고초를 겪었어요. 인문학적인 소재를 글에 녹여서 써내면 “이런 글들은 어차피 이 회사사람들 멍청해서 이해 못해.”라는 이야기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또 좌절을 했었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전공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마케팅회사에 들어갔습니다. 4개월 정도 생각 없이 일하다 보니 벌이도 괜찮은데 인생이 허하더라고요. ‘무엇을 위해서 살까’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내 영혼을 바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또 퇴사를 했죠, 한두 달 준비하다가 우연히 이곳의 공고를 보고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업무에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Q. 인문 100년 장학금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A. 학교 홈페이지 공지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인문학을 계속 연구하고 이를 통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선정하는 장학금이었어요. 저에게 딱 맞는 장학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블로그에 꾸준히 정리했던 글을 정리해서 심사위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책과 영화를 보고 함의를 분석해, 이를 현 사회에 대입시켜서 나름의 고찰과 해답을 수년간 글에 담았습니다. 저는 영화로 정리했지만 다른 누군가가 저처럼 시도한다면 연극이나 드라마나 사회현상 같은 것들을 블로그에 게재하거나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런 일련의 노력과 시선을 좋게 보신건지.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인문 100년 장학생으로서 인문학을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성과를 통해서 사회에 공언하겠다고 선서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Q. 취업 과정에서 선배로서 꿀팁이 있으시다면?A. 포트폴리오가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오랜 시간 동안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저의 경우 수년간 관람한 영화표를 수집해 실물 수첩으로 보관해두었고, 블로그에 영화, 책 등을 분석한 글을 써왔죠. 이런 작업들이 단순해보일 수 있지만 이 일(아카이브)을 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것들이 귀중한 기록이 될 수 있습니다. 비단 기록 분야뿐만이 아니라, 어느 직종이건 마찬가지일거예요. 꾸준한 노력은 누군가가 당신을 바라볼 때 분명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니까요. 그 덕에 짧은 시간이지만 다양한 직장을 돌아보고, 여러 직장의 면접을 체험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하찮고 작은 것처럼 보여도, 후대엔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뭐라도 찾아보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Q. 취업 과정에서 학과나 학교의 도움을 받은 것이 있으신가요?A. 처음 입사했었던 발굴연구소는 학교의 취업지원센터에서 취직공고가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어서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진로가 저와는 맞지 않아서 금방 나오기는 했지만요. 이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여러 회사를 전전할 때 학과 선후배들이 고민을 들어주고 힘을 많이 주었습니다.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들과도 지속적으로 연락하면서 조언을 받았습니다. Q. 앞으로의 목표가 있으신가요?A. 전국 팔도의 모든 마을을 아카이브 하고 싶습니다. 그 때까지 진심을 잃지 않고 지금과 같은 마인드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Q. 아카이빙이라는 것은 사람의 추억 같은 것들을 기록하는 일인가요?A. 추억과 진심, 미처 담지 못한 역사를 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올해 1월 1일, 공주로 여행을 갔을 때 한 식당에 들렀습니다. 가만히 앉아 여행을 회고하고 있을 적에, 옆 테이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이야기 잘 했어. 네 진심을 다 털어놔야 트라우마를 없애지.” 우연히 들은 이야기를 통해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설움이나 아픔이나 슬픔을 씻어낼 수 있는 치유가 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말한 도룡마을 사람들 역시 그랬겠지요. 다시 한 번 제가 하는 일에 대한 다짐을 되새겼습니다. 앞으로도 진심을 다해 임할 예정입니다. Q. 이야기를 듣다보면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많을 것 같습니다.A. 종종 당황스러운 때가 있는데, 정치 성향에 관한 이야기에요. 어르신마다 성향이 다르시니까 어떤 분은 ‘빨갱이’, 어떤 분은 ‘수구꼴통’ 하시며 분위기가 격앙되기도 합니다. Q. 그러면 어르신들이 같은 기억을 가지고도 정치성향에 따라서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다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A. 그렇죠. 근현대사에 대해 인터뷰를 할 때는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나곤 합니다. 가장 극명한 경우가 한국전쟁이에요. 화성시 송산면 독립운동가마을을 기록하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도 사상 면에서 이견을 드러내다보니, 해방 후 전쟁에 돌입하면서 사상을 위시한 갈등이 빚어졌죠. 고문이나 처형, 전쟁 중의 학살 과정에 대한 책임소재와 입장이 어르신들마다 달랐어요. 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나서서 어떤 사상이 옳았다고, 함부로 가치 판단하여 하나의 정답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진심을 세상에 온전히 전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죠. Q. 아카이브라는 개념이 대두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아카이브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A. 계속 확장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일원론적 사고는 허물어져가고 있고,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유교사상도 무너지고, 급격한 외부 사상의 도래와 기술발전과 함께 현 사회는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날, 우리를 지탱하던 인간성 역시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카이브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뿌리를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민간 아카이브라는 형태도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하나의 주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면 부탁드립니다.A. 이제 코로나 시대가 막을 열면서 걱정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취업이 힘들다고 난리였는데, 해가 지나면서 회사 들어가기가 갈수록 더욱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매번 끝이 없는 경쟁사회 속에서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취업전선이 더욱 힘들어질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이 준비한 만큼 열려있는, 미처 보지 못했던 취업의 문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취업이라는 것을 너무 정형화된 형태로 바라보아서 더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조금 더 이름난 기업, 안정적인 기업만을 바라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더욱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제가 속해있는 아카이브라는 새로운 직종도 있고 이외에도 역사를 통해서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직종들이 있을 것에요. 당장에 정확한 답을 드리진 못해서 미안한 이야기지만, 자신을 전공이나 학벌, 자격증 등에 얽매어 한계를 지나치게 설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무엇이더라도, 작은 것부터 준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노력을 하는 여러분을 보면서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나?” 라는 이야기를 할지 몰라요. 근데 그것이 1년, 2년, 3년 쌓이게 되면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후배님만의 보물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Q.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선배님의 진심을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아카이빙을 하면서 진심으로 진심을 담아내고 싶다고 하셨는데, 진심으로 2행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진 진행해온 여러 아카이브를 되돌아보며심 심각한 마음으로 대하기도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이 아 닌 진심이었습니다.[인터뷰, 글, 편집-국사학과 17학번 박건, 국사학과 17학번 최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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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화관광으로 지역 성장을 돕는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홍보팀장 권..
2021-02-22
‘사학도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학업에 임하여 주시고 역사는 한마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연결고리이자 과거의 잘못된 것을 현재에서 바로잡고 나아가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기 아주 좋은 학과라는 걸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역사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생각을 하는 그는 과거 대학교를 다닐 때도 발굴 현장과 경주에 있는 문화재들을 많이 보러 갔던 학생이었다. 그랬던 그는 현재 전국의 여러 지역 중에 유일하게 경북에만 있는 문화관광공사의 홍보팀장으로 자신이 과거에 보았던 여러 관광지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 주며, 지역 개발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경상북도에 남아있는 역사와 문화권으로 자신의 지역을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기 준비하고 있는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홍보팀장 권택일을 만났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고향 경주에서 태어나 84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국사학과에 입학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91년도에 국사학과를 졸업한 권택일입니다. 지금은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에서 홍보팀 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렇게 동문 후배님들과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가우며 감회가 새롭습니다.Q. 문화관광공사라는 곳이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데 문화관광공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A. 현재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는 경상북도의 지방 공기업으로 경북의 역사와 문화, 자연 생태 등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홍보하여 지역관광산업의 효율성 재고로 지역경제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과 경상북도 내에 있는 관광지 ‧ 관광단지 등의 개발과 조성, 관광인프라 확충, 문화관광축제 기획과 개최 등을 추진하는 문화관광전문공기업입니다. Q. 그렇다면 문화관광공사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나요? A.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는 1975년에 한국 관광의 효시인 보문 관광단지를 개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경주관광개발공사로 시작을 하였으며, 2012년에 경주를 벗어나 경상북도 전체로 넓혀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로 재출범하였습니다. Q. 문화관광공사는 국사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문화관광공사로의 취업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원래 저는 역사나 문화재와 관련된 곳에 취직을 준비하였으나, 뜻하지 않는 사정으로 인하여 대학교 졸업 이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그때 당시에 지금의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의 전신인 경주관광개발공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지원하였고, 94년 2월에 입사하여 현재까지 28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오랜 기간 동안 이곳에서 근무하시면서 문화관광공사에서 사학과로서의 이점이 있었다면 어떤 점들이 있었나요? A. 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로 역사가 깊은 불교문화의 전성기에 있었던 곳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 시기 문화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특히 현재 문화관광공사로 이름이 바뀌고 경상북도 23개 시군의 역사, 문화, 관광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어 생각보다 사학과의 장점이 많이 있습니다. Q. 어떠한 측면에서 사학과의 장점이 드러나는지 궁금합니다. A. 경상북도는 2021년 올해를 “3대 문화권 방문의 해”로 지정하였습니다. 3대 문화권은 신라의 불교문화, 안동의 유교문화, 고령의 가야문화를 뜻합니다. 어떻게 보면 경상북도만의 장점들이 대부분 들어가 있기 때문에 2021년은 전 세계에 경상북도를 알리는 중요한 한 해입니다. 그런데 사학과는 불교문화와 유교문화 그리고 가야문화까지 어느 과들보다 잘 이해하고 공부하는 학과이기 때문에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학과는 경상북도 각 시군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배운 전문가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상북도의 23개 시군은 그 지역 특성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의 발판으로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관광 명소화하는 일에 사학과생들이 가장 적합한 장점이 있습니다. Q. 그 동안 많은 사업들을 진행하셨을 텐데 지금까지 진행해온 사업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A. 2006년도에 우리 공사에서는 직원들의 역사에 대한 또 나아가 경주의 무수히 많은 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위해 박물관 대학을 신청자에 한해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때 저는 국사학과를 나온 덕분에 경주의 문화유산을 이해하기가 쉬웠고, 특히 관광객들에게 남산의 노천박물관을 설명할 때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2004년부터 시작한“체험! 경북가족여행”사업을 2008년부터 2015년까지 경북의 시군과 함께 수도권에 초등학교 자녀가 있는 가족을 대상으로 경북에 초빙하여 경북의 우수한 문화유산과 산, 바다, 강이 있는 수려한 환경을 체험하고 그 아이들이 또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찾고 싶은 경북을 만들고자 시작한 사업이 참가한 가족들의 격려 섞인 후기를 보면서 보람을 느꼈고, 시군과 협력한 덕에 많은 시군의 관계자들과 유대 관계가 돈독해져서 지금까지도 문제없이 업무협조나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Q.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후배님들의 학업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습니다. 못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사학도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학업에 임하여 주시고 역사는 한마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연결고리이자 과거의 잘못된 것을 현재에서 바로잡고 나아가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기 아주 좋은 학과라는 것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대인관계에 있어 국사학과는 최고의 과라고 생각하며, 모든 공기업이나 대기업에서도 입사 시에는 스펙도 중요하지만 입사 후에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아시고 역사학도로서 큰 포부를 가지시길 바랍니다.[인터뷰, 글, 편집-국사학과 16학번 정현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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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의 유산’을 사랑한 ‘고고학자’..
2021-02-22
Q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 안녕하세요. 학우 여러분. 저는 역사철학부로 입학해서 국사학을 주 전공으로 고고미술사학을 복수전공한 박성남이라고 합니다. Q : 역사철학부라는 명칭이 저에게는 무척 낯설어 보입니다. A :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고고미술사학과와 국사학과 철학과가 역사철학부 하나로 묶여 있었습니다. :) 지금은 입학할 때부터 국사학전공으로 들어가지요?- 네 맞습니다. 제가 입학할 때 당시에는 국사학과 단일 과로 입학했습니다. Q : 다음으로 궁금한 것이, 선배님께서는 고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셨는데, 그 구체적인 분야와 공부하게 되신 계기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A : 우선은, 학부생일 때 발굴에 참여했던 경험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예전 학교 박물관에서 시행한 학생복지관 부지 발굴현장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왕경현장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토기자료들을 보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계기가 되어서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서울에 있는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일할 때, 한강 유역의 신라 유적을 조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서울·경기지역의 인화문 자료들을 정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 간 것은 16년도입니다. 교토에 소재한 리츠메이칸대학의 문학연구과 행동정보학전공으로 입학하여, 고고학‧문화유산을 전수했습니다. (*專修는 ‘한 가지 분야의 기술이나 지식을 전문적으로 닦다.’ 라는 뜻입니다. - 박성남 선생님) 한국에서는 한강유역권의 통일신라 토기에 대해 정리하고 분석했습니다만, 일본으로 유학한 것을 계기로 권역을 넓혀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폭넓게 분포하는 통일신라 토기 양식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Q : 지금은 학생들이 발굴 기관과 연계한 학과 내 실습 프로그램으로 발굴 현장을 체험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수학하실 당시에는 발굴 사업을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었나 보네요? A : 당시에는 교내 박물관 차원에서 발굴조사를 추진했었습니다. 고고미술사학과의 ‘야외고고학’ 수업도 교내 발굴 현장에서 진행되었던 기억이 있네요. Q : 말씀드렸던 대로, 최근 학과와 발굴 기관 간의 연계 프로그램으로 현장실습이 가능해지면서, 고고학 분야로의 진출을 생각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사학과’ 학부 과정에서는 고고학에 관련한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고고학을 미래 진로로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으시다면? A : 일단, 학부 때의 전공과 대학원에서의 전공이 다른 케이스들도 많습니다. 학부 때 고고학 수업을 듣지 못했을 때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고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수업을 들을 때에도, 교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관심에 따라 진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학 전후로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요즘에도 다른 과 수업을 들을 수 있나요?- 네, 자율 선택 과목으로 수강 신청이 가능합니다. 저도 야외고고학, 박물관학을 수강했었습니다. A : 알아서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해서, 즉 고고미술사학과 전공수업이나 교양 수업을 선택해서 들으면 조금씩 고고학에 대한 기반지식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원을 가기 위해서 기초적인 개론 수업을 듣거나,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등의 노력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준비가 조금 덜 되었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실제로 문헌사학을 전공하다가 진학해서 고고학을 전공한 사례도 다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에서 기초지식이 모자란다고 판단되면, 해당 교수의 허락을 맡고 학부 수업을 청강하던지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늦게 시작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유학 시에 본인도 일본어가 능통한 수준까지는 아니어서, 학부 1‧2학년 수업을 청강한 바 있습니다. Q : 제가 생각하기에 고고학과 문헌사학은 결이 조금은 다른 학문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사학계에서도 문헌과 고고자료를 연계하여 연구가 이뤄지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고학과 문헌사학을 겸비한다는 것이 진학 및 연구에 있어서 큰 메리트로 작용할 수 있을까요? A : 문헌사학은 역사적 기록을 보고 연구하며, 고고학은 유적의 유구‧유물과 같은(*유적은 유구와 유물을 합한 상위의 개념입니다. - 필자) 물질자료를 보고 과거를 복원하며, 역사적 추론이 이루어집니다. 선사고고학의 경우에는 先史, 즉 역사적 기록보다 이전이기 때문에,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radiocarbon dating)이나 민족지학(Ethnographie) 등 연구 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반면 역사고고학이라 하면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물질자료와 문헌자료 간의 비교검토가 가능한 점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등의 사료들을 보면, 인간의 활동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무슨 죄를 지어 임금이 노했다.’ ‘어디에 사원을 건립했다.’ 등의 굵직한 사실들을 전합니다. 하지만 ‘누가 어떤 그릇을 사용해서 무엇을 먹었다.’ 에 대한 기록 같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문헌사학과 고고학은 서로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상호간의 기록‧연구결과의 대조를 통해 역사적 정황을 파악하고, 발굴 조사에 활용하는 등 상호보완적인 관계라 볼 수 있겠습니다. Q :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실 당시, 구체적인 연구 분야에 대한 설정이 있으셨습니까? 또, 입학할 때 당시 설정했던 연구 분야가 석,박 논문을 써 낼 때까지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이 보통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했던 현장이 통일신라 토기가 많이 나오는 현장이었고, 보고서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런 토기들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이후로도 어떻게 분화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석사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 생각이 일관적으로 발전하여 석사‧박사과정까지 범위를 넓히는 식(경주-한반도-한반도‧일본 열도)으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반면에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는 사람도 있는데, 큰 범주(전공 분야)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 시대를 바꾸거나, 토기를 연구하다가 기와에 흥미를 붙이는 등의 변화들은 있는 것 같습니다. Q : 우리의 고고학이 침탈기 이후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부분이 크기에, 일본으로의 유학은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일본어는 필수라고 들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일본 유학의 장점이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가장 힘드셨던 점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A : 제가 JLPT 2급을 가지고 갈 만큼 언어적인 부분이 조금 부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노력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고고학이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맞습니다. 광복 이후에 우리 스스로 발굴을 진행했을 때에도 일본인 학자를 초청해서 자문을 받아 조사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영남 지역은 일본과 교류가 잦고 영향을 받은 면이 큽니다. 하지만,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역은 영미권의 자료들을 기반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서 그쪽으로 유학을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서울에 계신 교수님들은 영국 쪽으로 많이들 가시더군요. 근래 들어서는 중국‧러시아와 교류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것을 공부하고 싶은지, 그 점을 고려하여 유학할 곳을 선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물론 일본어는 우리에게 친숙한 한자 문화권의 언어이기에, 배우기 수월하고 한자 실력도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습니다만,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스스로 수학하고자 하는 주제에 도움이 되는 언어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Q :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입학하자마자 논문 주제를 선정하고 연구를 시작해야 제때 졸업하기 쉽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A : 막 학부를 졸업한 시점에서 논문을 써내기 시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대학원수업을 들으면서, 자기가 염두에 둔 주제를 좀 더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컴퓨터-주변기기-마우스-마우스 휠 처럼요.) 범주를 계속 좁혀서 세부적인 연구 주제가 가시화되면, 그때 논문을 쓰게 될 것입니다. Q : 선생님께서는 신라 토기를 전공하셨는데, 고려문화재연구원은 서울‧경기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양한 시대의 유적들을 마주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인의 연구 분야와 차이가 있을 때에는 (유적을) 조사하는데 있어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발굴 현장에서 일하면서 든 생각인데, 저였으면 굉장히 고민스러웠을 듯합니다. 추후에 발굴 기관으로 취업하려고 할 때에 이러한 점 때문에, ‘신라 전공은 경주’, ‘백제(사비기) 전공은 부여’ 등 지역을 한정해야 할까요? A : 경주는 당연하게도 신라 관계된 유적들이 많으나, 서울‧경기 쪽으로 올라오면서 다양한 시대의 유적을 조사했었습니다. 제 전공이 신라이지만,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주거지, 백제‧고구려 석실분, 조선시대 건물지까지 폭넓은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공과는 다른 시대의 유적에서 작업하고 보고서를 집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한 일화로, 수원의 ‘광교 유적’이라는 곳이 있는데 신라 한강 진출기 전후 시기의 고분군입니다. 기관에서 여기를 조사할 당시에 저는 다른 팀이었습니다만, 불려가서 조사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유적이 어떤 시대(성격)이냐에 따라, 전공한 분야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경주에서 신라 왕경유적과 분황사를 조사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조선시대 건물지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도 방법적인 측면에서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대의 유적을 조사하건 간에 토층과 유구선을 잡아서 조사하는 방법은 공통적이고, 가령 같은 성격의 유적, 예를 들면 동일한 성격의 건물지 유적을 조사할 때에도 유적의 성격을 바탕으로 동일한 기법을 적용하기 때문에 크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또한, 파악이 어렵더라도, 주변 유적의 보고서를 참고하거나, 자문 회의를 통해 조언을 받을 수 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보고서를 집필하는 것 자체도(발굴 완료 후 2년 이내에 보고서를 간행해야 한다. - 필자) 생소한 분야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되며, 글을 쓰는 연습 또한 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도움이 많이 된다 생각합니다. Q : 감사합니다. 현장에서 들었던 쓸데없는 궁금증이 해결된 것 같아 기쁩니다. A :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에요. 저는 현장에 나오는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질문을 권장하는 것은, 학생들이 좀 더 많이 알아 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해요?’,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오나요?’ 하는 질문은, 오히려 질문 받은 본인에게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은 본인이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며,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해서는 본인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노력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물어보십시오! Q : 박사 논문을 쓰실 때까지, 정말 큰 노력을 기울이셨을 텐데, 그만큼 그 분야에 대한 애정이 없었더라면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본인의 전공 분야에 대한 매력을 꼽자면 무엇일까요? A : 통일신라 토기라고 하면 대표적인 것은 인화문토기입니다. 인화문토기를 보고 있으면 저런 문양들은 왜 찍었을까, 구체적으로 구름무늬(새, 꽃 등)를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사실 문양의 의미 하나하나를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왜 토기에 갑자기 장식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불러일으킵니다. 6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7세기로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도장 무늬(인화문)가 많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접 문양을 새기는 것보다 편하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어디에서 와서 갑자기 발현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인화문은 8세기와 9세기를 거치면서 사라지는데 또 왜 사라지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조선시대에도 분청사기로 대표되는 인화문이 시문된 자기가 있긴 합니다. -박성남 선생님) 이러한 궁금증들에서 비롯하여 토기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밥그릇, 국그릇, 국물 있는 반찬 등 식기는 그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다릅니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의 식생활, 즉 어떤 음식을 먹어서 어떤 용도에서 그릇의 모양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토기의) 탁본을 치고 자료를 수집하여 조사할 때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토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궁금증들이 저를 몰두하게 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별첨> 인화문 탁본 <골호 뚜껑 상단부 인화문 -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골호 뚜껑 상단부 인화문 - 나라현 텐리시 텐리참고관 소장>Q : 분야를 막론하고 앞으로 선생님처럼 공부를 계속 할 학부졸업예정자들에게 한 마디 해주실 수 있나요? A : 저는 인생의 모토가 ‘즐겁고 행복하자.’입니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분야에 있건 간에 상관 없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즐겁고 행복한 것이지요. 공부를 할 때 ‘체력이 힘들어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등의 이유로 걱정들을 많이 합니다. 저도 물론 걱정들이 있었지만, 걱정이 든다고 해서 제가 불행했던 적은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답을 찾는 것은 내 스스로가 발전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능력이 뛰어난 것은 둘째 치고, 자료를 보고 해석‧분석하는데 있어서 내 능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스스로 자료를 찾을 수도 있거니와, 교수님‧선후배‧동기 등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이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힘들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며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면, 즐겁고 행복하지 않거니와, 목표의식이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힘든 것과 별개로 재미있어야 합니다. 또 질문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하십시오. 두루뭉술하게 질문을 하면, 질문자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모르거나 곡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토기를 보다 보니 이 부분에 문양이 찍혀 있는데, 왜 꼭 이 부분에 찍어 냈어야 했는지’ 등 구체적으로 접근하십시오. 그래야 질문을 받는 사람이 질문의 요지를 쉽게 파악하고, 성심껏 답변을 해 줄 수 있습니다. 혹여 교수님이나 동기들의 전공분야가 조금은 다르더라도, ‘내 관점에서는 이렇게 보는데, 이렇게 접근해보면 어떨까?’ 하는 다른 관점에서의 답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항상 내가 무엇이 궁금한지 잘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십시오. Q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이번 학기부터 강의를 맡기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A : 일본에서 일반인들 대상으로 특강을 한 적이 있긴 한데, 한 학기 분량의 강의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공적으로는 지식의 전달자와 학습자 간의 만남이며, 사적으로는 선‧후배 간의 만남입니다.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이자 후배들에게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책임감도 듭니다. 긴장도 되고 상당히 복잡한 심경입니다. 아마도 비대면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니, 소통에 있어서도 어떤 방식이 좋을지 고민 중 입니다. 카톡이나 메일을 잘 활용해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피드백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Q : 강의는 어떤 식으로 진행할 예정이십니까? 강의의 간략한 주제와, 본인이 생각하기에 ‘학생들이 들었을 때 흥미롭게 느낄 것 같다’ 하는 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A : 고고 자료들을 어떤 식으로 역사 자료와 접목시켜서 활용할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염두에 둔 것은, ‘고대의 BTS는 누구였을까’, ‘한류의 시작은 언제부터였는가’ 등이 있겠습니다. 이야기하자면 국제 교류사에 초점을 맞춘 주제입니다. 왜 일본에서 신라 토기가 출토되었는지 등의 물질자료와, 신라 사람은 왜 일본에 갔으며, 기사에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등의 역사자료를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불교라는 문화 또한 외국에서 전래된 문화인데, 외래문화들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주었고 무엇으로 나타나는지도 살펴볼 것입니다. 또, 역사 드라마 속에서 나타난 의복, 그릇, 칼, 갑옷 등이 어떻게 고증되었는지도 알아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생활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이를 해석하는 것도 주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Q : 선생님께서는 학부생 때 수업을 열심히 듣는 편이셨습니까? 가장 흥미롭게 들으셨던 수업은 무엇입니까? A : 굉장히 열심히 들었습니다. 수업 때마다 맨 앞자리가 제 지정석일 정도로요. 그런데 놀기도 정말 많이 놀았습니다. 교수님과 막걸리도 많이 마셨지요. 어릴 때부터 역사가 재미있어서 관련 도서(위인전, 역사 소설), 드라마 등을 많이 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학에 들어와서 국영수를 배제하고 역사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니, 저로써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대학에서는 근현대사, 그 중에서도 일제강점기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암울한 시대적 배경에 대해 공부하다보니까 감정적으로 격해지더군요. 그러다가 신라 유적이 있는 현장을 가게 된 것을 계기로 고대사를 공부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근현대사와, 일본 내 재일교포의 역사에 관해 관심이 있고 꾸준히 독서중입니다. Q : 마지막으로 조금 있으면 볼 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시겠습니까? A : 대면수업을 통해 만날 수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아마 이번 학기까지는 비대면일 것 같습니다. 랜선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기 때문에,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번 학기 수업을 통해 조금 더 재미있게 역사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수업을 들으시거나 안 들으시거나 상관없이 후배 분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한 해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인터뷰, 글, 편집-국사학과 14학번 한경훈, 국사학과 17학번 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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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길로 꾸준히 연구하는 역사학자 김근식의 대학원스토리
2021-02-22
‘쉽게 말하자면 논문은 곧, 덕질입니다. 열정과 흥미가 없다면 덕질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학자의 길은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어 가는 과정 인 거죠.’ 讀書破萬卷(독서만파권) 下筆如有神(하필여유신), ‘독서 만권을 읽으면 글쓰기가 신의 경지에 있다.’ 라는 말은 SNS 상태메세지에서 그가 자신의 연구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5년째, 한길로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는 그는 오늘도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학자의 인생은 40부터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100세까지 대학교에서 혹은 학회에서 학자로써의 길을 나아가려고 한다. 그는 연구자로써 오늘도 철저한 준비와 열정으로 연구에 임하려고 하며, 앞으로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육자가 되려고 한다.그럼,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Q: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A: 저는 2020년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구려 벽화고분에 묵서연구〉라는 논문을 통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국사학과 00학번 김근식입니다. Q: 〈고구려 벽화고분에 묵서연구〉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를 하신 건가요? A: 이 논문은 고구려 벽화고분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서 왔고 그 다음에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 갔는지를 여태까지 학계는 벽화를 중심으로 시대를 나누었는데 제 논문은 이제 처음으로 벽화가 아닌 묵서를 통해서 시대를 나누고 고구려 벽화고문을 통해서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 겁니다. Q: 현재 벽화고분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학계에 많이 있나요? A: 사실상, 벽화고분 연구도 전국에서 2명밖에 없습니다. 물론, 벽화는 고고학에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역사학에서는 전호태 교수님하고 저하고 이렇게 둘 뿐입니다. Q: 그럼, 연구하시는 일외에 하시는 일은 있으신가요? A: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글로벌 한국사〉강좌를 맡고 있고요. 그리고 ‘한국고대문자자료데이터베이스’라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나온 토대사업인데 한국 금석문, 중국 금석문, 목간, 기타 등등의 문자자료를 인터넷에 데이터베이스를 하고 있어요. 그 사업이 끝나면 그쪽에 분명에 도움이 되실거라고 생각하고요. 지금은 여러 곳에서 강의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Q: 기회가 된다면 선배님 수업을 듣고 싶습니다. A: 네~수업 재밌어요. Q: 처음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어떻게 되시나요? A: 저는 좀 특이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은 있었는데 그 역사가 지금 생각하는 역사는 아니었고 역사소설을 처음 접했던 것 같아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소설이 이제 예를 들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그 다음에 최인호의 『상도』와 같은 작품들을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용돈으로 그 책들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Q: 역사를 전공으로 대학을 오게 된 계기는요? A: 중 고등학교 때, 사실 성적이 주요과목 국, 영 ,수, 사, 과 중에 수학 빼고는 다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사회계열 과목들은 공부 안하고 다 맞았어요. 그 정도로 역사 쪽이 쉽게 느껴졌어요. 그게 아마 계속 이어진 게 아닌가. 역사소설을 읽고 변했던 거는 점점 사실관계를 접하게 되면서 역사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물론,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의 역사소설을 보기를 했어요. 하지만, 그런 부분은 대학교에 들어올 때쯤 없어졌고요. 그래도 재미있게 봤던 게 김진명 작가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읽었던 게 와 닿았고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것은 제 주변이 유독 여행을 많이 갖던 것 같아요. 특히, 저희 가족은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많이 갔는데 꼭, 역사유적지를 많이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 내가 이런 거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역사소설과 역사유적지를 통한 답사를 좋아하게 된 거죠. 그래서 대학교를 사학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왔죠. Q: 대학생활에 있어서 진로과정이 궁금합니다. A: 처음에는 제가 나온 대학을 오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재수를 하려고 했어요. 당연하게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부모님이 굉장히 반대를 하셨죠. 이제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할 사람은 거기 가서도 한다.’ 그래서 대학교 1년 동안은 저는 사학과도 아니었어요. 인문과학 대에 들어갔는데 00학번은 11개의 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어요. 일단, 들어가서 과는 나중에 선택하는거에요. 그래서 저는 영문과 소속이었고요. 그래서 지금도 친한 사람들이 영문과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들이 지금 영문과가 아니에요. 다 국사학과, 사회복지학과, 일문, 중문학과…그럼에도 다 영문과에서 만났어요. 그렇게 군대를 다녀오고 2학년 때부터 국사학과에 갔는데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던 것 같아요. 학과에 기획부장을 맡으면서 답사도 기획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특히, 이 경주라는 곳을 제가 한번 다녀보자. 라는 것이 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였던 것 같아요. Q: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A: 누군가에게 역사를 가르쳐 주는 것에 대한 흥미가 생겼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 시험문제가 뭐 나올지 잘 맞췄어요. 의심받을 정도로…그것도 대학교는 주관식인데…어느 정도 뭐 낼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애들한테 가르쳐주기도 하고…또 그러다가 나오면 애들은 의심을 했지만, 저는 반대로 흥미를 느꼈고 이런 부분을 좀 더 깊게 연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느꼈던 게 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학회장을 하면서 동료들이랑 같이 학회일도 하고 선생님, 선배님들도 만나고 하다보니까. 대학원진학을 결심하게 됐죠. 그래서 4학년 때부터는 대학원 갈 준비를 했어요. Q: 그렇다면, 대학원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A: 학회장 할 때, 신현호 선생님께서 갑자기 자신의 전공인 『위지 동이전』을 강독하는 수업을 하고 싶으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수업을 갈 학생은 없으니까. 저는 학회장이니까 반 강제로 수업에 들어갔고, 주변에 친구들 설득해서 같이 한문공부를 했어요. 선생님이 얼마나 꼼꼼하셨는지 진도도 별로 나가지 못했어요. 한 문장을 가지고 몇 시간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한 문장을 가지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는 게 신기했어요. 이때, 처음으로 한문 보는 법을 알았고 나중에 김복순 교수님과 신현호 선생님이 같이 원전강의를 만드셔서 저는 무조건 그 수업들을 들었고요. 일단, 어려운 걸 떠나서 피드백이 되어서 재미있었어요. 예를 들면, 김복순 교수님이 『맹자』를 읽어보라 해요. 읽고 나서 교수님이 왜 이런 것들이 나왔나를 설명 해주시는 거죠. 한문의 순서, 읽는 방법 등을 잘 알려주셨던 것 같아요. Q: 대학원을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이 있을까요? A: 최선은 대학원을 오지 않는거에요.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요. 그렇지만, 이왕 들어왔다면 공부를 즐기시고 마음가짐을 다르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취업이 안 되니까 대학원을 간다고들 하는데 대학원을 들어오면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줄어요. 석사학위를 받는 순간, 부담스러워서 잘 뽑지 않습니다. 점점 일이 줄어듭니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더 줄어들고요. 그렇지만, 학위를 받고 들어간다면 전문전인 직장을 얻긴 하죠. 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거죠. 그 다음은 언어 중 하나는 반드시 마스터해야 대학원 올라가서 편해요. 그래야 잘 따라갈 수 있고 그런데, 그게 안 되면 너무 힘들어요. 왜냐하면, 하루에도 번역해야죠. 논문 읽어야죠. 남의 글 읽어야죠. 거기다 일해야죠. 미쳐요 사람이…이런 상황에서 언어 하나를 내가 터득하면 바쁜 생활 패턴이 조금 줄어들죠. 대학원에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으면 학부때 제대로 준비해서 대학원을 갔으면 좋겠어요. 어디를 가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준비상태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해요. 내가 어디에 있든 다른 곳을 가든 간에 거기 가서 같은 과정을 배우고 있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선 준비상태가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것을 모르고 가면 아마 대학원 생활이 쉽지는 않을거에요. 대학원은 공부를 하는 곳이거든요. Q: 대학원생활 하면서 있었던 장단점이 있었나요? A: 먼저 대학원을 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다 취직할 때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돈이 없어요. 돈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일반적으로 정기적인 수입이 없다는 거죠. 그렇다보니까. 장학금을 찾아보게 되는데 사실 그렇게 장학금도 많지는 않아요. 근데, 대학원 다니는데 돈이 많이 듭니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지원사업이라는게 있는데 그런 것도 잘 알고 가셔야해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주변에서 이런 거 잘 안 알려줘요. 주변에서 나한테 신경을 안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것들을 잘 알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대학원 생활에 있어서 지원도 받고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하면 충분히 여유가 생기거든요. 대학원에서는 수업은 몇 개 안되지만, 그 수업마다 계속 무언가를 해야 돼요. 번역을 하든, 논문준비를 하든, 다른 사람이 발표한다고 하면 그 사람 글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분명 ‘내가 공부를 했구나.’라는 느낌은 반드시 옵니다. 그렇기에 대학원생활자체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철저히 준비를 해왔을 때와 공부 자체를 즐기신다고 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장점이 나오는데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분명 재미있을 겁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만큼 열정이 온다면 대학원을 오시면 됩니다. Q: 고구려사를 연구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고구려사에 다한 관심은 아무래도 큰 역사? 신채호선생님의 영향도 있었고요. 아니면 제가 자꾸 경주, 그러니까 신라에 있으니까. 신라에 대한 반감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고구려사의 매력이 있었어요. 광대한 영토와 민족의 방파제에 멋있다는 것을 느꼈죠. 처음은 이랬던 것 같아요. Q: 그럼, 연구를 하면서 느꼈던 고구려는 어떤가요? A: 그런데 막상 깊게 들어가 보니까. 고구려라는 나라가 굉장히 허술하더라고요. 일단은 너무 전쟁을 자주했잖아요. 그런데, 전쟁을 자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잖아요. 먹고 살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한반도방파제 역할을 하고 싶어서 한건 아니지만, 계속 할 수밖에 없었어요. 북한지역이라는 곳이 사실, 평지라는 곳도 별로 없고 농업생산력도 떨어지는 지역이잖아요.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 뭔가 생각할 즈음에 벽화를 만나게 된 거죠. 벽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학부 때는 아니었고 대학원에 와서 관심을 가졌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죽을 때 과연,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산자의 공간과 죽은 자의 공간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이런 고민들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 저는 정치사, 전쟁사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문화사 사회사. 이쪽으로 돌아섰던 것 같아요. Q: 앞으로 역사학자로써 어떤 연구와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A: 이제는 고대사에서 제가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학에서 벽화연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보니까. 일단 제 몫이 전호태 선생님의 연구를 이어가는 연구자로써 역사학과 벽화를 전목 시키는 일도 있고 그래서 찾다보니까 중국벽화와 묵서도 연구하고 싶고요. 그리고 만약에 기회가 된다면 신라사 연구를 해보고 싶어요. 특히, 신라사찰과 왕릉과 관련된 것. 그리고 지리, 지형, 유적지 쪽으로 논문을 쓰고 싶어요. 그래서 계속 경주 쪽으로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제 박사학위를 받아서 언제 쓸지는 모르겠는데 신라사를 한번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Q: 선배로써,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먼저, 대학원을 오는 후배들은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요.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대학원에 들어오자마자 굉장히 낭패를 많이 봤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그 이후에도 들어오는 친구들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원에 들어와버렸죠. 그런 무방비 상태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니까. 하는 사람도 힘들고 가르치는 사람도 힘들어요. 그래서 정말 공부에 관심이 있고 대학원진학과 역사연구에 관심이 있으신 거라면 한문이나 최소한 언어 하나 정도는 준비하시는 게 좋아요. 준비를 해 오신다면 그 만큼의 유용성이 있을 것이고요. 만약에 그런 게 아니더라도 대학원에 대한 이해를 하시는 게 맞지 않을까. 대학원도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사실 여기도 상당히 치열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자리라는 것이 요새 석, 박사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퀼리티가 떨어져요. 의미가 없죠. 그 이유는 공부하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라는 거죠. 학력을 올리고자 대학원을 온다는 것은 정말 시간낭비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다른 진로를 권장합니다. 차라리 대학원에 내는 돈이면 외국 나가서 언어를 좀 더 배워와서 회화를 습득한다면 더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게임중독에 성적도 바닥인 제 친구가 호주에 갔다가 대기업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의 주어진 것을 최대한 많이 활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학부 때, 최대한 그것을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로 해주고 싶은 말은 즐겼으면 좋겠어요. 특히, 지금 우리가 경주에 있는 동국대학교 국사학과 아닙니까? 거기서 안타까운 게 나는 지방대 출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아무 의미 없는 나쁜 생각을 분명 일부는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학과는 분명 ‘경주’라는 천년고도. 역사공부를 하기 아주 좋은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것은 어마어마한 인프라입니다. 그것을 저는 여러분들이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절대 느끼기 힘들겁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경주에서 동국대학교 국사학과를 다니고 있다는 것에 자신감을 갖고 그것을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그 장점을 하나로 말하자면…우리 선생님 한분이 신라사를 하세요. 맨날 답사 갈 때마다 경주를 가요…‘야, 근식아 답사가자.’ 이러면서 제 차를 끌고 가요…그러면 가서 4~5시간 운전하지 2박3일 동안 숙소잡고, 밥먹어야지. 가는 데는 생각보다 몇 군데 안돼요. 시간이 많지 않아서…그런데 그렇게 갖다 오면 돈이 많이 깨져요. 그런데 여러분은 거의 공짜잖아요. 이런 점들을 알아주셨음 좋겠어요. 답사도 많이 다니시고 경주를 아껴주셨으면 좋겠어요. Q: 마지막으로 N행시를 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A: 생각해 오신 단어들 있으십니까? Q: ‘고대사’ 어떠십니까? A: 고대사로 하겠습니다. 고: 고대사를 공부하면 대: 대부분 포기해요. 그렇지만, 그게… 사: 사실이에요.^^ [인터뷰, 글, 편집-국사학과 16학번 부성준]